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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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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버트 2세는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 로버트 1세의 외손자이자 스튜어트 왕조를 연 인물이다. 그는 데이비드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으며, 재위 기간 동안 잉글랜드와의 관계, 스튜어트 가문의 권력 강화, 왕위 계승법 제정 등 다양한 문제에 직면했다. 로버트 2세는 두 번 결혼하여 많은 자녀를 두었으며, 역사적 평가에서는 그의 통치 능력에 대한 엇갈린 견해가 존재한다.

2.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

로버트 1세의 딸 마조리 브루스와 스코틀랜드 제6대 스튜어드 월터 스튜어드 사이에서 외동으로 태어난 로버트 스튜어트는 1316년에 태어났다. 마조리 브루스는 출산 중 또는 직후 사망했다.[2] 로버트는 게일 귀족의 교육을 받으며 뷰트 섬, 클라이드사이드, 렌프루에 있는 스튜어트 영지에서 성장했다.[2] 1315년 의회는 아버지의 상속자로서 마조리 브루스의 권리를 삼촌인 에드워드 브루스에게 넘겼다.[3] 에드워드는 1318년 10월 14일 던독 근처 포거트 전투에서 사망했고,[4] 그 결과 12월에 서둘러 소집된 의회에서 국왕에게 후계자가 없을 경우 마조리의 아들인 로버트를 상속자로 지정하는 새로운 테일지를 제정했다.[5] 1324년 3월 5일 로버트 국왕이 아들, 즉 후일의 데이비드 2세를 낳으면서 로버트 스튜어트의 추정 상속자 지위는 사라졌지만, 1326년 7월 캠부스케네스에서 열린 의회에서 데이비드가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그를 상속 순위에 다시 올렸다.[3] 그의 지위 회복과 함께 아рга일, 록스버러, 로디언의 토지가 하사되었다.[6]

스테유어트(Stewart) 가문은 1150년, 초대 월터 피츠알란이 데이비드 1세로부터 스코틀랜드 왕실 집사(Lord High Steward)로 임명되면서 대대로 세습하여 그 직함인 집사 (Steward)에서 유래되었다. 이후 메리 여왕이 프랑스 취향에 따라 철자를 스튜어트(Stuart)로 변경했다.

1318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로버트 1세가 후계 남성 없이 붕어할 경우 마조리의 아들에게 왕위가 주어질 것을 정했지만, 1324년에 아들 데이비드가 태어나 1329년에 데이비드 2세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371년 데이비드 2세는 자식 없이 붕어했고, 데이비드 2세의 프랑스 망명 중에 섭정으로서 실질적으로 스코틀랜드 국내를 통치했던 로버트 2세가 새롭게 왕위에 올라 스튜어트 왕조를 열었다.

2. 1. 추정 상속인

로버트 1세의 딸 마조리 브루스와 스코틀랜드 제6대 스튜어드 월터 스튜어드 사이에서 외동으로 태어난 로버트 스튜어트는 1316년에 태어났다. 마조리 브루스는 출산 중 또는 직후 사망했다.[2] 로버트는 게일 귀족의 교육을 받으며 뷰트 섬, 클라이드사이드, 렌프루에 있는 스튜어트 영지에서 성장했다.[2] 1315년 의회는 아버지의 상속자로서 마조리 브루스의 권리를 삼촌인 에드워드 브루스에게 넘겼다.[3] 에드워드는 1318년 10월 14일 던독 근처 포거트 전투에서 사망했고,[4] 그 결과 12월에 서둘러 소집된 의회에서 국왕에게 후계자가 없을 경우 마조리의 아들인 로버트를 상속자로 지정하는 새로운 테일지를 제정했다.[5] 1324년 3월 5일 로버트 국왕이 아들, 즉 후일의 데이비드 2세를 낳으면서 로버트 스튜어트의 추정 상속자 지위는 사라졌지만, 1326년 7월 캠부스케네스에서 열린 의회에서 데이비드가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그를 상속 순위에 다시 올렸다.[3] 그의 지위 회복과 함께 아рга일, 록스버러, 로디언의 토지가 하사되었다.[6]

스테유어트(Stewart) 가문은 1150년, 초대 월터 피츠알란이 데이비드 1세로부터 스코틀랜드 왕실 집사(Lord High Steward)로 임명되면서 대대로 세습하여 그 직함인 집사 (Steward)에서 유래되었다. 이후 메리 여왕이 프랑스 취향에 따라 철자를 스튜어트(Stuart)로 변경했다.

1318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로버트 1세가 후계 남성 없이 붕어할 경우 마조리의 아들에게 왕위가 주어질 것을 정했지만, 1324년에 아들 데이비드가 태어나 1329년에 데이비드 2세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371년 데이비드 2세는 자식 없이 붕어했고, 데이비드 2세의 프랑스 망명 중에 섭정으로서 실질적으로 스코틀랜드 국내를 통치했던 로버트 2세가 새롭게 왕위에 올라 스튜어트 왕조를 열었다.

2. 2.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제2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은 존 발리올 왕 시대에 시작되었다.[7] 1295년 10월 프랑스와의 상호 원조 조약 체결, 1296년 3월 스코틀랜드의 잉글랜드 침략은 잉글랜드 왕을 분노하게 했고, 스코틀랜드 침략을 촉발하여 베릭어폰트위드를 점령하고 던바에서 스코틀랜드 군대를 격파했다.[9] 윌리엄 월리스와 앤드루 모레이가 이끄는 잉글랜드에 대한 저항이 존 발리올 왕의 이름으로 나타났고,[9] 그들이 죽은 후,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에 계속 저항하여 결국 스코틀랜드 왕위를 차지했다.[8]

로버트 1세 사후 5세의 데이비드 2세가 즉위하자, 존 발리올의 아들 에드워드 발리올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의 묵인과 "추방자"의 명시적 지지하에 브루스 주권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다.[13] 1332년 더플린 무어 전투와 1333년 핼리던 힐 전투에서 에드워드 발리올 군대는 브루스 지지자들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었는데, 핼리던 힐 전투에는 17세의 로버트가 참여했다.[11] 로버트의 영지는 발리올에 의해 점령되었고, 애솔 명목 백작 데이비드 스트래스보기에게 넘겨졌지만, 로버트는 덤바턴 성에서 보호를 받았다.[12]

덤바턴 성


1334년 5월, 데이비드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하였고,[12] 로버트는 스코틀랜드 서부에서 자신의 영지를 되찾기 시작했다.[11] 1335년 데어시 성에서 열린 의회에서 로버트의 지지를 받은 스트래스보기는 잉글랜드 왕에게 항복하고 스코틀랜드 감시관이 되었으나, 로버트는 1335년 9월에 에드워드에게 항복하고 12월 초에 후견인 자격을 포기했을 가능성이 높다.[16]

데어시 성


컬블린 전투에서 서 앤드루 모레이 오브 보스웰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17] 모레이는 1335-1336년 겨울에 던펌린에서 후견인으로 임명되었고,[19] 그의 캠페인은 에드워드 3세가 스코틀랜드 남부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기회를 없앴다.[20] 1339년 봄 또는 여름에 쿠퍼, 스코틀랜드 퍼스는 서 윌리엄 더글러스, 리들스데일 영주, 로버트 스튜어트, 드럼사가드의 모리스 머레이의 연합군에 의해 점령되었고,[21] 에든버러는 1341년 4월 리들스데일의 윌리엄 더글러스에 의해 계략으로 점령되었다.[22]

1341년 6월 초, 데이비드 2세는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24] 1346년 10월 17일, 로버트는 네빌스 크로스에서 데이비드 2세와 함께 전투에 참전했으나, 데이비드 2세는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고 로버트와 마치 백작 패트릭은 현장에서 도망친 것으로 보인다.[11]

2. 3. 데이비드 2세의 포로 생활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데이비드 2세가 포로로 잡히고, 랜돌프가 사망하면서 섭정은 다시 로버트에게 돌아갔다.[26] 1347년, 로버트는 엘리자베스 뮤어와의 사이에서 낳은 네 아들, 캐릭 백작 존(미래의 국왕 로버트 3세), 파이프 영주 월터(1362년 사망), 로버트(미래의 올버니 공작), 알렉산더, 바데노크 영주 (미래의 부에인 백작)와 여섯 딸의 적자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혼인 허가를 요청하는 중요한 조치를 취했다.[27] 이는 글래스고 교구의 귀족 아가씨 엘리자베스 모어와 이사벨라 부텔리에가 3, 4촌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로버트, 스트라그리피스 영주(글래스고 교구)는 처음에 이사벨라와 성관계를 맺었고, 그 후 4촌 관계에 있었지만 이를 알지 못한 채 엘리자베스와 관계를 맺었으며, 한동안 그녀와 함께 살면서 그녀에게서 많은 남녀 아이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이에 스코틀랜드 왕과 주교들은 외모가 훌륭한(''aspectibus gratiose'') 자녀들을 위해 로버트와 엘리자베스가 결혼할 수 있도록 교황에게 특면을 요청하고, 그들의 자녀를 적자로 선언해 줄 것을 청원했다.[25]

잉글랜드의 포로였지만 데이비드 2세는 스코틀랜드에서 영향력을 유지했고, 로버트는 의회에 의해 그의 섭정직을 박탈당하고 마 백작, 로스 백작, 더글러스 영주에게 공동으로 주어졌다. 이는 오래가지 못했고 로버트는 1352년 2월 의회에 의해 다시 섭정으로 임명되었다.[28] 석방된 데이비드 2세는 이 의회에 참석하여 로버트와 삼부회 의원들에게 그의 석방 조건들을 제시했다. 여기에는 몸값 요구가 없었지만 스코틀랜드인들이 잉글랜드의 왕자 존 오브 곤트를 추정 상속자로 지명할 것을 요구했다. 로버트가 자신의 상속권을 위협하는 제안에 반대하면서, 의회는 이 조건을 거부했고,[29] 국왕은 억류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 헨리 나이턴은 이 사건에 대해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의 영향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한 왕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자신들이 행한 모든 행위와 상해, 억류 기간 동안 저지른 모든 범죄에 대해 그가 사면하지 않는 한, 그리고 그에 대한 안전을 제공하지 않는 한, 그를 몸값으로 지불하거나 몸값을 지불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들을 다스릴 다른 왕을 선택하겠다고 위협했다고 썼다.[30]

1354년까지 국왕 석방을 위한 진행 중인 협상은 9년 동안 갚아야 하는 9만 마르크의 직접적인 몸값 지불 제안과 20명의 고위 인질 제공으로 보장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 이 합의는 로버트가 1355년 잉글랜드에 대항하는 프랑스의 행동에 스코틀랜드인을 묶었을 때 파괴되었다.[31] 버윅어폰트위드의 점령과 프랑스의 잉글랜드 영토 진주는 에드워드 3세가 스코틀랜드에 대항하여 움직이도록 자극했다. — 1356년 1월, 에드워드는 군대를 스코틀랜드 남동부로 이끌고 에든버러와 이스트로디언 헤딩턴, 그리고 로디언의 대부분을 불태웠는데, 이 캠페인은 "타버린 캔들마스"로 알려지게 되었다.[32] 9월에 에드워드가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한 후, 스코틀랜드는 데이비드 2세의 석방을 위한 협상을 재개하여 1357년 10월 버윅 조약으로 끝났다. 그 조건은 데이비드 2세의 자유를 대가로 10년에 걸쳐 연간 할부로 10만 마르크의 몸값을 지불하는 것이었다. — 첫 두 번의 지불만 초기 완료되었고 1366년까지 추가 지불은 없었다.[33] 버윅 조약의 조건을 지키지 못하자 에드워드는 데이비드 2세의 플랜태저넷 왕가의 후계자를 계속 요구할 수 있었는데, 이는 스코틀랜드 의회와 아마도 로버트 자신에 의해서도 거부되었다.[34] 이것은 1363년 로버트와 더글러스 백작, 마치 백작에 의한 짧은 반란의 원인이 되었을 수 있다.[35] 나중에 프랑스의 유도에도 불구하고 데이비드 2세는 그들을 돕지 않았고,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국가는 잉글랜드와 평화를 유지했다.[36]

3. 스코틀랜드 국왕

1318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로버트 1세가 후계 남성 없이 붕어할 경우 마조리의 아들에게 왕위가 주어질 것을 정했지만, 1324년에 아들 데이비드 2세가 태어나 1329년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371년 데이비드 2세는 자식 없이 붕어했고, 데이비드 2세의 프랑스 망명 중에 섭정으로서 실질적으로 스코틀랜드 국내를 통치했던 로버트 2세가 새롭게 왕위에 올라 스튜어트 왕조를 열었다.

즉위 당시 이미 54세였던 로버트는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고 거의 맹인이었으며 "Old Blearie" (흐릿한 눈 할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했다.[102] 재위 기간 동안 선왕 데이비드 2세의 잉글랜드에 대한 몸값 지불, 더글라스 가문과 퍼시 가문의 항쟁 등 큰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103] 노령의 로버트는 거의 업적을 남기지 못했고,[104] 그의 아들들이 실권을 장악했다.

3. 1. 스튜어트 가문의 권력 강화

로버트 2세는 1371년 데이비드 2세가 사망한 후 왕위를 계승했다.[37] 즉위 과정에서 더글러스 백작 윌리엄의 무력 시위로 인해 대관식이 지연되기도 했으나,[38] 딸 이사벨라와 더글러스의 아들 제임스의 결혼, 더글러스의 포스 남쪽 저스티시어 임명 등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41] 로버트 2세의 즉위는 데이비드 2세로부터 직위를 받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조지 던바는 파이프 영지에 대한 주장을 잃었고, 토마스 에르스킨은 에든버러 성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42]

스튜어트 가문은 서부, 애솔, 극북 지역에서 소유지를 크게 늘렸다.[43] 로버트 2세는 아들들과 사위들에게 주요 직위와 영지를 분배하여 권력을 강화했다. 파이프 백작과 멘테스 백작은 둘째 아들 로버트에게, 부칸 백작과 로스 백작은 넷째 아들 알렉산더에게, 스트래턴 백작과 케이스네스 백작은 두 번째 결혼의 장남 데이비드에게 주어졌다.[43] 왕의 사위로는 아일스 영주 존 맥도널드, 모레이 백작 존 던바, 제임스 더글러스 등이 있었다.[43] 왕의 상속자인 캐릭 백작 존은 에든버러 성과 스털링 성의 관리자가 되었고,[11] 알렉산더는 왕의 북부 저스티시어이자 부관이 되었다.[11]

로버트 2세의 전사 및 기사: 로버트 2세의 대인장의 뒷면, 19세기 강철 조각으로 강화됨


1373년, 로버트 2세는 의회를 통해 왕위 계승법을 제정하여 스튜어트 왕조의 미래 안정을 도모했다.[44][45] 또한 1375년에는 존 바버에게 시 "더 브루스" 작성을 의뢰하여 스튜어트 가문을 로버트 1세의 진정한 상속자로 묘사하고, 검은 더글러스 시르 제임스와 왕의 아버지 월터 스튜어트의 애국적 행위를 강조하여 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려 했다.[43]

로버트 2세는 잉글랜드와의 관계에서, 국경 내 잉글랜드 영토 문제와 스코틀랜드인들의 충성 문제에 직면했다.[47] 1371년 프랑스와 방어 조약을 체결했지만,[48] 1373년부터 잉글랜드 점령 지역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어 1375-77년 동안 가속화되었다.[49] 머치 백작은 1376년 애넌데일을 회복했지만, 브뤼헤 휴전 조약으로 제약을 받았다.[50] 1378년, 왕은 콜딩햄 수도원을 던펌린 수도원에 귀속시키는 헌장을 발표했다.[52] 1384년,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 지역에 대한 전면 공격을 감행하여 로크마벤 성과 테비오트데일을 되찾았다.[53] 존 오브 곤트는 에든버러까지 진격했지만, 해딩턴은 파괴되었다.[54]

스테유어트(Stewart) 가문은 1150년 초대 월터 피츠알란이 데이비드 1세로부터 스코틀랜드 왕실 집사(Lord High Steward)로 임명되면서 대대로 세습하여 그 직함인 집사 (Steward)에서 유래되었다. 이후 메리 여왕이 프랑스 취향에 따라 철자를 스튜어트(Stuart)로 변경했다.

1318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로버트 1세에게 남성 후계자가 없을경우, 로버트의 딸 마조리의 아들에게 왕위가 주어질 것을 정했다. 이후 1324년 로버트 1세의 아들 데이비드가 태어났고 1329년에 데이비드 2세로 왕위에 올랐지만, 1371년에 데이비드 2세가 후계없이 붕어하자, 데이비드 2세의 프랑스 망명중에 섭정으로서 스코틀랜드를 통치했던 로버트가 왕위에 올랐다.

로버트 2세는 즉위 당시 54세로 건강이 좋지 않았고, "Old Blearie" (흐릿한 눈 할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했다.[102]

3. 2. 잉글랜드와의 관계

로버트 2세 치세 동안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선왕 데이비드 2세가 잉글랜드에 지불해야 할 몸값 문제가 남아 있었고, 더글라스 가문과 퍼시 가문의 항쟁 등 국경 분쟁도 계속되었다.

3. 3. 권력 상실과 죽음

로버트의 아들인 존 캐릭 백작은 알렉산더 버컨 백작이 북쪽에 있었던 것처럼 포스 강 남쪽에서 가장 중요한 스튜어트 가문의 유력자가 되었다.[58] 알렉산더의 활동과 게일인 용병들이 시행한 왕실 행정 방식은 북부 백작들과 주교들, 그리고 그의 이복 동생인 데이비드 스트래던 백작의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불만은 국왕이 버컨의 활동을 억제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면서 의회 내에서 국왕의 입지를 약화시켰다.[59] 전쟁 수행 방식에 대한 캐릭 추종자들과의 의견 차이와 북쪽의 버컨을 처리하려는 지속적인 실패 또는 무능함은 1384년 11월 정치적 격변으로 이어져, 의회가 국왕의 통치 권한을 박탈하고 캐릭을 왕국의 부관으로 임명했다. 이는 일종의 쿠데타였다.[43][60] 로버트가 물러나면서 전쟁을 막을 장애물이 사라졌다. 1385년 6월, 1200명의 프랑스 군대가 스코틀랜드 군에 합류하여 더글러스 백작과 로버트의 두 아들인 존 캐릭 백작과 로버트 파이프 백작이 참여하는 작전을 수행했다.[61] 작은 승리가 있었지만, 프랑스 사령관과 스코틀랜드 사령관 사이의 다툼으로 인해 중요한 록스버러 성 공격이 중단되었다.[62]

캐릭의 측근 동맹인 제임스 더글러스 백작이 전사한 오터번 전투를 묘사한 중세 미니어처


1388년 8월 노섬벌랜드에서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에 승리한 오터번 전투는 캐릭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사상자 중에는 캐릭의 측근 동맹인 제임스 더글러스 백작이 있었다. 더글러스는 상속자 없이 사망하여 여러 사람이 그의 작위와 재산을 주장하게 되었다. 캐릭은 더글러스의 여동생의 남편인 말콤 드럼몬드를 지지한 반면, 파이프는 더글러스 영지에 상속권이 있던 성공적인 원고인 아치볼드 더글러스 윅타운 백작이자 갤러웨이 영주를 지지했다.[63] 파이프는 이제 그의 강력한 동맹인 더글러스와 국왕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함께 12월 의회 회의에서 반 쿠데타를 보장하여 스코틀랜드의 후견인 지위가 (최근 말에 차여 심하게 부상을 입은) 캐릭에서 파이프로 넘어갔다.[63][64] 많은 사람들은 또한 파이프가 북부의 무법 상태, 특히 그의 남동생 버컨의 활동을 적절히 해결하려는 의도를 승인했다.[64] 파이프는 버컨에게 북부 부관과 포스 강 북쪽의 치안 판사의 직무를 면하게 했다. 후자의 역할은 파이프의 아들 머독 스튜어트에게 주어졌다. 로버트 2세는 1390년 1월 말 북동부를 순회하며, 아마도 버컨이 권력을 잃은 후 북쪽의 변화하는 정치 상황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65] 3월에 로버트는 에어셔의 던도널드 성으로 돌아와 4월 19일에 사망했으며, 4월 25일 스콘에 묻혔다.[66]

1390년 로버트 2세가 사망한 던도널드 성


로버트 2세는 즉위 당시 이미 54세였고,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거의 맹인이었으며, "Old Blearie"(흐릿한 눈 할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했다.[102]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선왕 데이비드 2세의 잉글랜드에 대한 몸값 지불, 더글라스 가문과 퍼시 가문의 항쟁 등 큰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103] 노령의 로버트는 거의 업적을 남기지 못했고,[104] 그의 아들들이 실권을 장악했다.

4. 역사적 평가

로버트 2세의 치세는 역사가 고든 도널드슨(1967)과 레날드 니콜슨(1974)의 연구 이후 재평가를 받았다. 도널드슨은 (그가 글을 쓰던 당시) 로버트의 통치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음을 인정했으며, 그의 치세 초기에 기록한 연대기 저술가들이 비판할 거리가 거의 없었다고 받아들였다.[67] 도널드슨은 로버트가 왕위에 오르기 전과 후의 경력을 "최소한 별볼일 없었고, 그의 치세는 그것에 광채를 더하지 못했다"고 묘사했다.[68] 도널드슨은 더 나아가 교황의 특별 허가를 받은 로버트와 엘리자베스 무어의 교회법상 결혼의 적법성에 대해 논쟁을 벌였지만, 1371년과 1372년의 왕위 계승법이 의회의 눈으로 볼 때 이 문제를 마무리했지만 엘리자베스 무어와 유페미아 로스의 후손 간의 세대 간 불화를 종식시키지는 못했음을 인정했다.[69] 도널드슨에 따르면 로버트가 할리돈 힐 전투와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 참전했던 경험은 그가 잉글랜드에 대한 군사 원정을 승인하는 것을 꺼리게 만들었고, 그의 남작들이 그러한 행동을 해도 그에게 숨겼을 것이다.[70] 마찬가지로 니콜슨은 로버트의 통치를 부족하다고 묘사했으며, 그의 통치 능력 부족이 내부 갈등으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니콜슨은 더글러스 백작이 로버트의 대관식 직전에 무력 시위를 벌인 후 매수되었으며, 이를 엘리자베스 무어와의 사이에서 낳은 로버트의 아들들의 적통성에 대한 의문과 연관시킨다.[71]

반대로 역사가 스티븐 보드먼(2007), 알렉산더 그랜트(1984, 1992), 마이클 린치(1992)는 로버트 2세의 삶에 대해 더욱 공정한 평가를 내린다.[71] 현대 역사가들은 특히 그의 통치 초 10년 동안 왕국이 더욱 부유해지고 안정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11] 보드먼은 로버트 2세가 하이 스튜어드였을 때 부정적인 선전에 시달렸다고 설명한다. 데이비드 2세의 추종자들은 그가 대리 통치 기간 동안의 행동을 비난하고 이를 "폭정"이라고 묘사했으며, 나중에 그의 아들 존, 캐릭 백작의 지지자들이 로버트가 의욕과 업적이 부족하고 나이가 들어 통치하기에 부적합한 왕이라고 말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72][73] 로버트 2세가 게일 스코틀랜드와 연관된 것도 비판을 받았다. 그는 서부의 조상 땅에서 자랐고 게일어와 문화에 완전히 익숙했으며 헤브리디스, 상부 퍼스셔, 아길의 게일 영주들과 강력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로버트는 치세 내내 게일족의 핵심 지역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고, 당시 스코틀랜드 로우랜드에서 제기된 불만은 왕이 게일족 문제에 너무 많이 관여한다는 시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74] 보드먼은 또한 로버트 2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의 많은 부분이 프랑스 연대기 저술가인 장 프로아사르의 저술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며, 프로아사르는 '은 붉고 흐릿한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모래단의 색깔로 보아 그는 용감한 사람이 아니라 현장에 나가는 것보다 집에 머물 사람임이 분명했다'고 기록했다.[75] 프로아사르의 견해와는 달리, 초기 스코틀랜드 연대기 저술가인 앤드루 오브 윈턴과 월터 보워 (둘 다 로버트 2세와 거의 동시대의 자료를 활용)와 15, 16세기 후반의 스코틀랜드 연대기 저술가와 시인들은 "로버트 2세를 스코틀랜드의 애국적인 영웅, 스코틀랜드 왕국의 통합을 수호하는 자, 로버트 1세의 직계 후계자로 묘사했다".[76]

그랜트(1992)는 로버트 2세의 통치가 외교 및 국내 정책 측면에서 "그렇게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77] 로버트의 대관식 전에 윌리엄 더글러스 백작이 무력 시위를 벌인 것과 관련하여, 그랜트는 더글러스가 로버트의 왕위 계승 권리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기보다는 로열 패트로나지가 데이비드 2세 시대처럼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가깝다고 본다. 그랜트는 또한 시위가 로버트의 전임자로부터 에든버러, 스털링, 덤바턴 성을 소유하고 있던 아버지와 아들인 로버트 에르스킨과 토마스 에르스킨을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77] 그랜트는 로버트 2세의 통치에 대한 유효한 자료로서 프로아사르의 저술의 신뢰성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78] 캐릭이 이끄는 영향력 있는 거물 연합은 왕의 입지를 약화시킨 후 1384년 11월 의회를 조종하여 로버트 2세로부터 실질적인 권력을 빼앗았다.[79] 그랜트는 로버트의 노쇠 주장에 대해 거의 무게를 두지 않으며, 1388년 캐릭의 폐위와 1389년 잉글랜드-프랑스 휴전에 참여하려는 결의는 모두 로버트 2세의 사주로 이루어졌다고 시사한다.[80] 그러나 권력은 로버트 2세에게 반환되지 않고 캐릭의 동생인 파이프 백작 로버트에게 넘어갔다. 이로 인해 왕은 다시 그의 아들 중 한 명의 처분에 놓이게 되었다.[81] 그럼에도 불구하고, 윈턴과 보워 모두가 의존했던 알려지지 않은 자료는 파이프가 국정에 관해 아버지에게 복종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두 아들의 섭정 방식의 차이점을 강조했다.[82]

마이클 린치는 1371년부터 1384년 캐릭의 대리 통치까지 로버트 2세의 통치는 지속적인 번영과 안정을 특징으로 했다고 지적하며, 보워 수도원은 이 시기를 "평온, 번영, 평화"의 시기로 묘사했다.[83] 린치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2세와 더글러스 가문 간의 1450년대의 문제(일부 역사가들은 로버트 2세가 강력한 영주를 장려한 정책의 유산으로 해석)는 데이비드 2세가 변방과 갤러웨이에 지역 영주들을 구축한 것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로버트는 더글러스 가문과 스튜어트 백작들을 그들의 봉토에 그냥 두는 정부에 만족했다.[84] 린치는 정부의 약화는 1384년 쿠데타 이전이 아니라 그 이후에 발생했으며, 쿠데타의 근본적인 원인은 로버트 2세가 셋째 아들 부칸 백작 알렉산더 스튜어트("바데노크의 늑대"로 알려짐)를 편애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85]

4. 1. 긍정적 평가

로버트 2세의 치세는 역사가 고든 도널드슨(1967)과 레날드 니콜슨(1974)의 연구 이후 재평가를 받았다. 도널드슨은 로버트의 통치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치세 초기에 기록한 연대기 저술가들이 비판할 거리가 거의 없었다고 보았다.[67] 그러나 도널드슨은 로버트가 할리돈 힐 전투와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 참전했던 경험으로 인해 잉글랜드에 대한 군사 원정을 꺼리게 되었다고 평가했다.[70] 니콜슨 또한 로버트 2세의 통치를 능력 부족으로 인해 내부 갈등이 발생했다고 묘사했다.[71]

반면, 역사가 스티븐 보드먼(2007), 알렉산더 그랜트(1984, 1992), 마이클 린치(1992)는 로버트 2세의 통치에 대해 더욱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71] 현대 역사가들은 그의 통치 초기 10년 동안 왕국이 더욱 부유해지고 안정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11] 보드먼은 로버트 2세가 데이비드 2세의 추종자들과 그의 아들 존의 지지자들로부터 부정적인 선전에 시달렸다고 설명한다.[72][73] 또한, 로버트 2세가 게일 스코틀랜드와 연관되어 있었던 점도 비판의 대상이었는데, 그는 서부의 조상 땅에서 자랐고 헤브리디스, 상부 퍼스셔, 아길의 게일 영주들과 강력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74]

그랜트(1992)는 로버트 2세의 통치가 외교 및 국내 정책 측면에서 "그렇게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77] 윌리엄 더글러스 백작의 무력 시위는 왕위 계승 반대보다는 로열 패트로나지가 데이비드 2세 시대처럼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가깝다고 보았다.[77] 또한, 장 프로아사르의 저술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며,[78] 1384년 의회를 조종하여 로버트 2세로부터 실질적인 권력을 빼앗은 캐릭의 행동을 비판했다.[79]

마이클 린치는 1371년부터 1384년 캐릭의 대리 통치까지 로버트 2세의 통치는 지속적인 번영과 안정을 특징으로 했다고 평가하며, 보워는 이 시기를 "평온, 번영, 평화"의 시기로 묘사했다고 언급했다.[83] 린치는 정부의 약화가 1384년 쿠데타 이전이 아니라 그 이후에 발생했으며, 쿠데타의 근본적인 원인은 로버트 2세가 셋째 아들 부칸 백작 알렉산더 스튜어트를 편애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85]

4. 2. 부정적 평가

로버트 2세의 치세는 역사가 고든 도널드슨과 레날드 니콜슨의 연구 이후 재평가를 받았다. 도널드슨은 로버트 2세의 통치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경력을 "최소한 별볼일 없었고, 그의 치세는 그것에 광채를 더하지 못했다"고 묘사했다.[68] 또한 로버트 2세가 할리돈 힐 전투와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 참전했던 경험으로 인해 잉글랜드에 대한 군사 원정을 꺼리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70] 니콜슨 역시 로버트 2세의 통치를 부족하다고 평가하며, 그의 통치 능력 부족이 내부 갈등을 초래했다고 지적했다.[71]

반면, 역사가 스티븐 보드먼, 알렉산더 그랜트, 마이클 린치는 로버트 2세의 삶에 대해 보다 공정한 평가를 내린다.[71] 현대 역사가들은 그의 통치 초기 10년 동안 왕국이 부유해지고 안정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11] 보드먼은 로버트 2세가 하이 스튜어드였을 때 데이비드 2세의 추종자들과 그의 아들 캐릭 백작의 지지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고 설명한다.[72][73] 또한, 로버트 2세가 게일 스코틀랜드와 연관되어 있었고, 헤브리디스, 퍼스셔 상부, 아길의 게일 영주들과 강력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74]

그랜트는 로버트 2세의 통치가 외교 및 국내 정책 측면에서 "그렇게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77] 장 프로아사르의 저술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다.[78] 그는 1384년 11월 의회에서 캐릭 백작이 로버트 2세로부터 실질적인 권력을 빼앗은 사건[79]에 대해 로버트 2세의 노쇠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80]

마이클 린치는 1371년부터 1384년 캐릭의 대리 통치까지 로버트 2세의 통치는 지속적인 번영과 안정을 특징으로 했다고 지적하며,[83] 정부의 약화는 1384년 쿠데타 이전이 아니라 그 이후에 발생했으며, 쿠데타의 근본적인 원인은 로버트 2세가 셋째 아들 부칸 백작 알렉산더 스튜어트("바데노크의 늑대"로 알려짐)를 편애한 것이라고 주장한다.[85]

5. 결혼과 자녀

로버트 2세는 두 번 결혼하여 많은 자녀를 두었다.[87]

1336년, 로월런의 아담 뮤어 경의 딸인 엘리자베스 뮤어와 처음 결혼했다.[86] 이 결혼은 정식 절차가 아니라는 비판을 받았고, 1347년에 교황의 면제를 받은 후 1349년에 재혼했다.[86] 엘리자베스 뮤어와의 사이에서는 존 (후에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3세), 월터, 로버트, 부칸 백작 알렉산더 스튜어트 (별명은 "바데노크의 늑대") 등 열 명의 자녀를 두었다.[87]

1355년, 로버트는 로스 백작 휴의 딸인 유페미아 드 로스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87] 유페미아 드 로스와의 사이에서는 스트래선 백작 데이비드 스튜어트, 애솔 백작 월터 스튜어트 (제임스 1세 암살에 연루되어 처형됨), 엘리자베스, 에지디아 등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87]

로버트 2세는 또한 여러 명의 사생아를 두었는데, 그 중에는 뷰트 후작의 조상인 뷰트의 존 스튜어트 보안관과 토마스 스튜어트 등이 있다.[88][89]

6. 가계도

로버트 2세는 월터 스튜어트, 스코틀랜드 제6대 하이 스튜어드와 마조리 브루스의 아들이다.[87][91] 아버지 쪽으로는 제임스 스튜어트, 스코틀랜드 제5대 하이 스튜어드와 에기디아 드 부르의 손자이고,[91] 어머니 쪽으로는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1세와 마르의 이사벨라의 외손자이다.[87] 로버트 1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각 애넌데일의 로버트 드 브루스 6세 경과 캐릭의 마조리이다.[94]

로버트 2세는 두 번 결혼했다. 1347년 11월 22일, 엘리자베스 뮈어와 첫 번째 결혼을 하여 존(1337년-1406년,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3세), 로버트(1340년-1420년, 올버니 공작) 등을 낳았다. 1355년 5월 2일, 유페미아 드 로스와 두 번째 결혼을 하여 데이비드(1356년-1389년 이전, 스트래선 백작), 월터(1360년경-1437년, 아솔 백작) 등을 낳았다.

그의 서자로는 뷰트 후작가의 시조가 된 서 존, 세인트 앤드루스 주교가 된 토마스 스튜어트 등이 있다.

7. 기타

참조

[1] 서적 Handbook of British Chronology
[2] 서적 Kings & Queens
[3] 서적 Early Stewart Kings
[4] 서적 Companion to Medieval Warfare
[5] 서적 History of Scottish Parliament
[6] 서적 Kings and Queens of Scotland
[7] 서적 Power of the Past
[8] 서적 Independence, Wars of
[9] 서적 Kings & Queens
[10] 서적 Britain's Royal Families
[11] 서적 Robert II ODNB
[12] 서적 Early Stewart Kings
[13] 문서 The disinherited
[14] 서적 Medieval Scotland
[15] 서적 Medieval Scotland
[16] 서적 Early Stewart Kings
[17] 서적 Medieval Scotland
[18] 서적 Andrew Murray ODNB
[19] 서적 Medieval Scotland
[20] 서적 The Wars of Scotland, 1214–1371
[21] 서적 David II Tuckwell Press Ltd. 2004
[22] 서적 Medieval Scotland
[23] 서적 The Wars of Scotland, 1214–1371
[24] 서적 The Wars of Scotland, 1214–1371
[25] 웹사이트 Petitions to the Pope: 1342–1419 http://www.british-h[...] 2009-04-04
[26] 서적 Border Fury
[27] 서적 History of Scottish Parliament
[28] 서적 History of Scottish Parliament
[29] 서적 Early Stewart Kings
[30] 서적 History of Scottish Parliament
[31] 서적 Early Stewart Kings
[32] 서적 The Wars of Scotland
[33] 서적 The Wars of Edward III
[34] 서적 The Wars of Edward III
[35] 서적 Medieval Scotland
[36] 서적 The Wars of Edward III https://books.google[...]
[37] 서적 English Writers: An Attempt Towards a History of English Literature https://books.google[...] Cassell, limited 2021-02-20
[38] 서적 Early Stewart Kings
[39] 서적 History of Scottish Parliament
[40] 서적 New Cambridge History
[41] 서적 Early Stewart Kings
[42] 서적 Early Stewart Kings
[43] 서적 Kings & Queens
[44] 서적 Medieval Scotland
[45] 간행물 The Records of the Parliaments of Scotland to 1707 http://www.rps.ac.uk[...] 2012-05-21
[46] 서적 Early Stewart Kings
[47] 서적 Early Stewart Kings
[48] 서적 Border Fury
[49] 서적 War and Border Societies
[50] 서적 Border Fury
[51] 서적 Border Fury
[52] 서적 War and Border Societies
[53] 서적 Early Stewart Kings
[54] 서적 Early Stewart Kings
[55] 서적 War and Border Societies
[56] 서적 Early Stewart Kings
[57] 서적 Early Stewart Kings
[58] 서적 Medieval Scotland
[59] 서적 Early Stewart Kings
[60] 서적 New Cambridge History
[61] 서적 Kings and Queens
[62] 서적 War and Border Societies
[63] 서적 War and Border Societies
[64] 서적 New Cambridge History
[65] 서적 Early Stewart Kings
[66] 서적 History of Scottish Parliament
[67] 서적 Scottish Kings
[68] 서적 Scottish Kings
[69] 서적 Scottish Kings
[70] 서적 Scottish Kings
[71] 서적 Robert II
[72] 서적 New Cambridge History
[73] 서적 Early Stewart Kings
[74] 서적 The Great Ill-Will of the Lowlander
[75] 서적 Early Stewart Kings
[76] 서적 Early Stewart Kings
[77] 서적 Independence and Nationhood
[78] 서적 War and Border Societies
[79] 서적 Kings and Queens
[80] 서적 Independence and Nationhood
[81] 서적 Kings and Queens
[82] 서적 History of Scottish Parliament
[83] 서적 Scotland: A new History
[84] 서적 Scotland: A new History
[85] 서적 Scotland: A new History
[86] 서적 Britain's Royal Families
[87] 웹사이트 The Scottish Royal Dynasties 842–1625 http://www.royal.gov[...] The official website of the British Monarchy 2018-02-19
[88] 서적 Britain's Royal Families: The Complete Genealogy https://books.google[...] Random House
[89] 서적 The Peerage of Scotland http://quod.lib.umic[...] 1764
[90] 논문 "Nephew of the Duke": the Danielstons of that Ilk, and a hitherto unknown daughter of Robert II, King of Scots 2007-09
[91] 서적 The Scots Peerage
[92] 서적 The Scots Peerage
[93] 웹사이트 Burgh, Walter de
[94] 서적 Robert the Bruce
[95] 웹사이트 Mar, Donald (d.1297)
[96] 웹사이트 Isabella of Mar https://www.stewarts[...] 2019-02-15
[97] 서적
[98] 웹사이트 Lords of Misrule http://cunninghamh.t[...]
[99] 웹사이트 Tranter first edition books, publication timeline, part IV http://CunninghamH.t[...]
[100] 웹사이트 Robert II king of Scotland https://www.britanni[...]
[101] 서적
[102] 서적
[103] 서적
[10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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